요한복음 20 아버지와 아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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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목사 댓글 0건 조회 617회 작성일 23-05-27 12:50본문
아버지와 아들처럼(요한복음 강해요약20)
요한복음 5장 19-30절
가업(家業)은 한 집안이 대대로 이어서 하는 일을 말합니다. 가업을 잇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아주 평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왜 안식일에 사람을 온전케 했느냐’는 유대인의 질문에,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17). 마치 가업을 잇는 듯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하시는 일을 내가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십니다(19).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공격의 시작은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라는 단 한마디에 38년된 병자는 온전케 되었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는 고침받은 병자를 성전에서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14). ‘더 심한 것이 생기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 영존하는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의 본질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요16:9).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냐면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이시자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거부하면 그분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하고 자신이 주인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된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죄의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주인되어 살아가는 인생에겐 결코 참 안식은 없습니다. 38년된 병에서 온전케 되었을지라도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심한 것, 즉 영존하는 생명과 참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왜 안식일에 병자를 온전케 했느냐’는 유대인들의 추궁에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일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19).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은 그 병자가 너무 불쌍해서 충동적으로 고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아버지께서 보이신 뜻을 따라 일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는 일의 평가는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뜻을 알고 예수님처럼 ‘그분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순종하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그분의 일을 보여주신 것은 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20). 참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좋은 것은 온전히 알려주고 그 일을 같이 하고 싶어 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참 안식을 주는 일을 그분의 아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께서도 아버지를 사랑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21,24,25,26).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생명이 없는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며, 죽은 자들도 일으켜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자가기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21). 죽은 자를 ‘일으킨다’(21)는 것은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8)하고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38년된 병자를 일으키시면서 자신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살리십니까?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 살리는 것은 아들이신 예수님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주인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주인된 죄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신 나의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됨을 깨닫고 회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처음 오신 것은 심판을 행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고 생명을 얻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25,26).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25). 구원은 육신의 생명이 끝난 다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살아있는 지금이 바로 예수님을 믿어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을 때입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심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22,23,27).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심판의 권세 또한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받고 계신 공경을 아들도 똑같이 받도록 하시기 위해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십니다(22,23).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온전히 주셨기 때문에 아들이신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는 마지막 심판을 하시기 위한 주님으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다니엘 대언자가 대언한 ‘사람의 아들’이십니다(단7:13,14).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심판의 권위를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27).
예수님께서는 더 큰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20). 현재의 일과 가까운 미래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먼 미래의 일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마지막 심판하실 때에 있을 일입니다(28,29). 여기서의 ‘부활’은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두 번째 죽음이 없는 부활, 영원한 부활을 뜻합니다. 처음 오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이 후 한번 더 들을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생명의 음성이지만, 그날은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없는 심판을 선고하는 음성입니다.
생명과 정죄의 부활은 선을 행한 것과 악을 행한 것을 기준으로 말씀하십니다(29). 선과 악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순종과 연결되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받아 그대로 순종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순종하는 삶이 선과 악의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일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심판의 전권을 받으셨지만 그분을 보내신 이의 뜻을 따라 심판을 집행하십니다(30). 그분께 순종하느냐가 선과 악의 기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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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아버지와 아들처럼_요한복음 강해20_설교요약.pdf (119.2K) 6회 다운로드 | DATE : 2023-05-27 12: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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