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3 죽이려는 자와 죽음을 준비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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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목사 댓글 0건 조회 308회 작성일 24-01-26 20:32본문
죽이려는 자와 죽음을 준비하는 자(요한복음 강해요약43)
요한복음 12장 1-19절
죽음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그것이 언제 어디서 찾아올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죽음은 꼭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맞이하는가’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자가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반면에 죽음을 피하려는 자가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알고도 죽음으로 걸어가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유월절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로 가셨습니다(1). 죽기 위해 가시는 여정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가지 않을 길이었습니다. 그곳엔 그분께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나사로에 대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킨’이라고 기록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만 쓰이는 표현인데 나사로에게 딱 한번 쓰였습니다. 나사로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 십자가에 달리시기 일주일 전에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2). 예수님께서 처음 기적을 행하셨을 때 가나의 혼인잔치엔 손님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잔치의 주인공으로 오셨습니다. 마르다는 잔치를 위해 분주하게 섬겼고 나사로는 예수님 곁에서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때 마리아가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가져왔습니다. 향유 한 근은 300데나리온인데 노동자의 1년치 임금이었습니다. 그날 그 잔치에서 한 순간에 예수님을 위해 쏟아부은 것입니다.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고 마리아의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았습니다. 온 집이 향유의 냄새로 진동했습니다(3).
요한복음 처음에 침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예수님의 신발끈 풀 자격도 없다’고 하며 예수님을 증거하며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심을 앞둔 예수님을 위해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부으며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며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마지막을 준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례자 요한에 대해 ‘여자나 나은 자 중에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신 것처럼 마리아에 대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그녀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마26:13).
반면에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자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입니다(4). 요한복음에서는 제자 가룟 유다를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넘길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나드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말합니다(5). 어떻게 보면 그의 말이 옳아 보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돈에 관심이 많은 자입니다. 그의 관심에는 가난한 자가 없었습니다(6).
마리아의 행동과 가룟 유다의 행동을 완전히 대비하여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드려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사람이지만, 그분의 제자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배반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분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입니다. 둘 다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했지만, 한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했고, 제자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떠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하는 행동을 ‘가만히 두라.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죽음을 예고하십니다(8).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그때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이웃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만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고 사람들이 모였습니다(9). 나사로는 예수님 부활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나사로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11). 그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고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 나사로도 죽이려고 했습니다(10). 나사로가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오심을 증거했던 침례자 요한도 제거하려 했던 그들이, 이제는 예수님도 제거하고 그분의 능력의 증인인 나사로도 제거해서 예수님을 기억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할 자이지만 옳은 길로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고치고 부요케 하시고 회복시키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합니다. 그 분 앞에 자신을 낮춥니다. 자신을 낮춤으로 예수님이 높여지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침례자 요한은 예수님 앞에 납작 엎드려 주님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또한 예수님 앞에 납작 엎드려 값비싼 것을 드려 주님을 섬겼습니다. 아까워하지 않았고 섬길 수 있는 주님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참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자신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로 맞이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자신들의 기대를 채워줄 메시아가 오셨다고 기뻐했습니다(12,1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 의해 죽임당하시지만, 오히려 자신을 고난과 죽음으로 내몰아 죽음에서 자기 백성을 생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스가랴서는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성경입니다(슥9:9). 예수님께서 영광받으시기 전에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고 예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을 심판하고 정복하기 위해 오신 왕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고난받고 죽임당하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것입니다(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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