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1 나사로와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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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목사 댓글 0건 조회 290회 작성일 24-01-13 08:33본문
나사로와 예수님(요한복음 강해요약41)
요한복음 11장 17-44절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가셨을 때는 이미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습니다(17).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고 이제 살 소망이 전혀 없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15스타디온(약3km)쯤 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8). 왜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최종목적지는 베다니가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끝이 아니라 최종목적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이미 나사로의 장례를 조문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19).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맞이하러 갑니다(20). 마르다는 예수님 앞에 한탄합니다(21). 그녀의 한탄은 오라버니를 고치시지 못한 예수님을 원망하는 말이 아니라 아쉬움의 한탄이었습니다. 그래도 마르다는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위로해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22).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믿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분께서 죽은 사람은 살리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39).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르다는 그분의 말씀을 ‘세상 마지막 부활 때의 말씀’이라고 제한해 버립니다(23,24).
우리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믿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만큼 하나님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그분의 끝없는 사랑을 내 생각만큼 제한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주실만큼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들을 행하시며 자신이 누구신지(빛, 생명, 선한 목자 등)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기적을 행하실 때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25).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그분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참 부활과 생명이심을 알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26). 그분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서 믿는 자도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주께서 그리스도시고,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27). 그녀의 고백은 완전했지만 여전히 그의 믿음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습니다(39). 그러나 그분을 알아갈수록 그녀의 믿음은 자신의 고백과 같이 되어갈 것입니다.
신앙생활 또한 그렇습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을 배우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삶 속에 참 믿음이 되기까지 점차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먼저 만나 뵙고 동생 마리아를 부릅니다(28,29). 마리아는 즉시 예수님께로 갑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니 조문왔던 유대인들도 마리아를 따라 동행합니다(30,31). 마리아 또한 언니와 같이 예수님께 마음을 쏟아놓습니다(32).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신음하며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우셨습니다(33-35). 예수님께서 단지 나사로의 죽음이 슬퍼서 우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괴로움은 곧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지만 여전히 사망 가운데 사람들이 고통하는 것에 대한 괴로워하고 슬퍼하신 것입니다(사5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 슬퍼하시기만 하는 무력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죽음 가운데 생명으로 이끄시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알리는 예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우시는 것에 대해 유대인들의 두 가지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했는가!’라고 생각합니다(36).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까?’ 나사로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예고라면 이렇게 바꾸어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까?’ 바로 나사로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그분의 백성들을 죽음에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유대인들은 ‘눈먼 자도 치료해 준 사람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못했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을 때까지 내버려 뒀습니까?’는 질문입니다. 이 또한 바꾸어 질문하면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실 수 없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처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없기 때문에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으로 가셨습니다(38).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39). 돌을 치우게 하신 후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한다’고 기도하십니다(41). 이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들 앞에 기도하시며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생명과 부활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42).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명령하십니다(43).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심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빛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시는 주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죽었던 나사로는 수의에 묶인 채 걸어 나옵니다. 그의 얼굴은 수건으로 묶여 있었지만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셨습니다(44). ‘수건’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장면에서 한번 더 나옵니다(요20:7). 나사로의 부활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하는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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