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지식에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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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목사 댓글 0건 조회 489회 작성일 23-08-12 13:02본문
모든 지식에 사랑을…. (설교요약)
고린도전서 10장 31절
31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겐 훨씬 더 잘 알려진 믿음의 사람이지만 사실 바나바가 믿음의 선배이고 바울은 믿음의 후배입니다. 바나바(별명, 이름은 요세)는 그리스도의 핍박자였던 바울이 회심했을 때 그를 교회로 천거했던 믿음의 둘도 없는 선후배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둘이 심하게 다투며 나뉘어졌던 사건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행15:36-41).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고 복음 전도자들이었지만 그들은 헤어질만큼 격렬하게 다투었습니다. 문제는 ‘선교여행에 마가의 동행여부’였습니다. 바울은 1차선교여행에서 한번 변심한 마가를 2차선교여행에 데려갈 수 없다는 입장이고 바나바는 함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둘은 서로 나뉘어져 따로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들의 다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분리시켜서 다른 지역에 복음전파를 위해 허락하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서로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고 서로 자기의 정답을 주장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답이 꼭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고 바나바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사람 일은 어찌될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바울은 마가를 불러들입니다. 디모데후서를 보면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오라고 하며 ‘그가 사역을 위해 내게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딤후4:9-11). 어쩌면 바울이 그쯤에 바나바를 다시 만났다면 그 때 일을 사과했을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쟁이 심한 교회였습니다(고전1:11). 여러 가지 분쟁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파벌의 문제, 형제들 간에 법적인 문제, 음행의 문제, 남자와 여자에 관한 문제,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등 여러 가지 분쟁꺼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분쟁들의 이유에 대해 ‘너희들이 아직 영적으로 갓난 아이같기 때문’이라고 정리합니다(고전3:1-3). 분쟁에 대해서 바울은 ‘너희가 육신에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고전3:3). 바울은 분쟁에 대해 육신의 지배와 성령의 지배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육신의 지배를 받는 것은 결국 ‘자기 사랑’입니다. 반대로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께 지배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께 지배받을 때 나타나는 열매는 사랑입니다.
교회가 갓난 아이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일수록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 본능에 충실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을 배려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고린도전서10장에서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고전10:31). 이 말씀의 진짜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의 내용을 근거로 뒤에 행동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고전8:1-3). 지식만으로는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에 사랑을 더하면 덕을 세웁니다. 안다고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냥 누군가를 사랑해서 사랑하는 것은 인본주의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참된 능력은 죄인된 인간에게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었지만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고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지식과 자유가 있었지만 그 자유를 제한하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형제를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행동의 이유가 나의 유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고전10:23,24).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먹는 것도 정답이고 먹지 않는 것도 정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것이 행동의 원리이었습니다.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이 자기 유익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시작된 질문이었습니다. 상대방의 유익에 따라 먹고 먹지 않는 정답이 바뀌었던 것입니다(고전10:25-28). ‘왜 내가 다른 형제 때문에 내 자유를 침범당해야 하는냐?’ 고 반문하는 것(고전10:29,30)에 대한 대답이 바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었습니다(고전10:31-33).
나만을 세우기 위해서는 지식으로만 접근합니다. 그러나 남을 세우기 위해서는 지식에 더해 사랑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적법하나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리 안에 자유를 주님께서 내게 주셨지만 형제와 자매를 위해,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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