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5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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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목사 댓글 0건 조회 390회 작성일 23-11-18 20:12본문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요한복음 강해요약35)
요한복음9장 13-23절
어둠 속에 있으면 두렵습니다. 그러나 빛으로 나아오면 그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도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은 어둠입니다. 어둠 뿐인 세상은 그에게 두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에 진흙을 발라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떴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어둠 속에서 빛 가운데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바리새인에게 데려갑니다(13). 안식일에 맹인이 눈을 뜬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종교지도자의 해답을 듣고자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14).
바리새인들이 다시 눈멀었던 자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그도 다시 대답합니다(15). 이미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에 38년된 병자를 치료하신 적이 있었고 그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론을 내놓았습니다(요5:16).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아닌 평일에도 그를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하필 안식일에 그를 치료하셨습니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습니다. 하루 더 맹인으로 산다고 문제될 건 없었습니다. 한시를 다투는 응급환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은 다 목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기적을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은 바로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표적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기적들을 행하신 이유는 바로 그분이 바로 안식일을 성취하러 오신 참 안식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신 것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마11:28, 마12:8).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안식일의 참 의미를 알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옛 대언자들이 전했던 일들이 나타내시는 것을 보며 ‘드디어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 오셨구나’라고 가장 먼저 알았어야 했습니다. 적어도 정말 그것이 사실인지 살펴보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분명한 답을 해야 할 바리새인들은 분열되었습니다(16). 예수님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분명한 대답을 내어놓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맹인이었던 자에게 질문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대답에 대한 책임을 돌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맹인이었던 자는 대답을 피하지 않고 분명히 ‘예수님을 대언자’라고 대답합니다(17). 아마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대언자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을 구약에 나아만 장군을 치료해 주었던 엘리사 같은 대언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왕하5장). 적어도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의 대답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인정하는 자를 공동체에서 내쫓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그를 인정하는 것이 두렵습니다(22).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는 적절한 이유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의 부모를 증인으로 불러서 묻습니다(18,19). 바리새인들은 어떻게든 믿지 않을 증거를 찾기 위해 그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기로 결정하고 이유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의 부모도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대답합니다.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는 답변하지만 책임질만한 것에 대해서는 답을 피해 버립니다(20,21). 사실 부모는 자기 아들이 치료해 준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22). 그런데 그들이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을 인정하는 듯한 답을 하면 그들이 내쫓기는 처지가 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22,23). 그리고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것은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의 부모를 비롯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었던 종교지도들도 다른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감히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어둠 가운데로 빠져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인정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롬10:13). 예수님 당시, 초대교회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사형당할 각오를 해야 할 수 있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이 땅에서 하는 예수님을 부르는 고백과 그 말의 무게가 전혀 다를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는 자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시느니라.
18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나니 이는 두려움에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면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더 분명히 고백할수록 두려움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마치 맹인이었던 자가 육신의 눈을 뜨고 점점 더 영적인 눈을 뜨며 예수님을 분명히 고백했던 것처럼,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더욱 분명하고 담대히 고백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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