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6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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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목사 댓글 0건 조회 217회 작성일 24-07-19 21:49본문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요한복음 강해요약66)
요한복음 19장 31-42절
우리는 모두 시한부(時限附)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살면서 특별한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생은 시한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기에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와 동시에 ‘어떻게 잘 죽어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천여년 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처음부터 죽기 위한 오심이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를 생각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때를 따라 사셨고 그 때는 십자가의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분은 날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는 시한부 인생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걷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죽음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됨으로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실체가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유월절 정오부터 유월절 어린양을 잡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과 일치합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다음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31). 유월절 날 해가 지고 안식일이 시작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유대인들은 죄수들을 빨리 죽여 시신을 처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십자가의 죄수들을 빨리 죽이는 방법은 그들의 다리를 꺾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죄수들이 불쌍해 빨리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땅이 더러워지고 안식일을 어길 것을 염려하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신21:22,23).
빌라도는 다리를 꺾어서 십자가에 달린 자들을 죽이도록 허용해 줍니다. 그런데 군사들이 다른 자들의 다리는 꺾었지만 예수님의 다리는 꺽지 않습니다(32,33).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군사들은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 죽음을 확인합니다(34, 막15:44).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고 그것을 본 자가 분명하게 증언합니다(35).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분명히 죽으셨다는 것을 군사들, 증인들, 증거들을 통해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것은 성경기록의 성취라고 증언합니다(36, 시34:20). 그리고 예수님은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기에 말씀대로 그분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것입니다(출12:46).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리시고 그분을 찌른 자들이 그분을 보는 것 또한 성경 말씀의 성취였습니다(37). 사실 직접 그분을 찌른 자들은 군사였지만 주님은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찌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신 주님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보며 통곡하는 세상 사람들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에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분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인데, 마지막 날 심판하시는 주님을 보게 될 것이고 최후 심판으로 인해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계1:7).
반대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 그 분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깨닫고 회개하며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그분을 보는 것입니다(슥12:10). 이 땅에서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이 있음을 요한복음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38). 그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이자 부자였고 하나님의 왕국을 기다리는 자였습니다(마27:57, 막15:43). 이전에는 유대인들이 두려워 은밀하게 주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의 죽음 이후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부탁하며 공개적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 니고데모가 있습니다(39). 그 또한 한밤중에 주님을 찾아와서 진리를 찾았던 유대인들의 지도자였습니다(요3장). 그 또한 향품(약37kg)을 가져와 요셉과 같이 주님의 장례를 치르며 주님을 공개적으로 따릅니다(40).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동산 안에 새 돌무덤에 예수님을 묻었습니다(41). 그 무덤은 아리마대 부자인 요셉이 쓸 무덤이었습니다(마27:60). 아주 짧은 시간에 주님의 장례가 치러졌지만 그분의 장례는 죄인의 장례가 아닌 왕의 장례로 치러졌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시한부 인생으로 초청하십니다(눅9:23). 이 땅에서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가 아니라 주님과 같이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주님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를 주님의 신부라고 비유합니다(요3:29). 주님을 믿는 것은 결혼식이라면 결혼생활은 평생 이뤄 가야 할 삶입니다. 부부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부부답게 살아가는 것은 평생동안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한순간이지만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한 평생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그 길은 주님께서 가신 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주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먼저 나를 부인할 때 가능합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께 순종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 길 끝에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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